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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풍경] 1. 아무것도 없어서, 모든 것이 남은 곳 – 부여

by redsnow 202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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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에 간다고 했을 때

“거기 뭐 보러 가?”
그 질문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가 그냥 말했다.
“잘 모르겠어. 그래서 가보려는 거야.”

 

지금 우리에겐 이유 없는 여행이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다.
어디든 뭔가를 봐야 하고, 남겨야 하고, 기억해야만 한다.
그런데 부여는 이상하게도
‘그냥 걸어보기 위해’ 가고 싶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부여. 출처 디지털부여문화대전


바람이 느려지는 도시

부여는 바람도 느리게 분다.
소리도 적고, 색도 부드럽다.
정림사지 5층석탑 앞에 섰을 때,
나는 오랫동안 말없이 그 앞에 서 있었다.

균형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돌들의 질서.
백제의 미학은 그 침묵 속에 남아 있었다.

이 도시에는 과장된 기념비도, 떠들썩한 거리도 없었다.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이 오래 머물렀다.

 

정림사지 5층석탑. 출처 부여군청.


오래된 사랑과 마지막의 비극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성’이었다.
123년 동안 왕들이 이곳을 다스렸고, 사람들은 이 강을 따라 살았다.

부여는 한 편의 사랑 노래로 시작되었다.
신라의 공주를 향한 서동의 노래는 부여의 전설이 되었고,
그 끝엔 의자왕이 있었다.

660년, 이곳 부소산성에서 백제는 무너졌고,
궁녀들이 낙화암에서 강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백마강을 따라 흐른다.

사랑과 몰락, 그 두 이야기를 품은 도시.
그래서 부여는 오래도록 마음을 붙잡는다.

 

낙화암. 출처 부여군청.

 


천오백 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부여는 이후로 조용했다.
시간이 가라앉고, 기억도 퇴색했지만
그 조용함이 이 도시를 더 깊게 만들었다.

요즘 들어 부여는 조용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한옥을 개조한 카페,
백제문화단지의 왕실 체험 프로그램,
감성을 품은 작은 전시 공간들.

2023년엔 ‘한국 슬로시티’로 선정되었고,
‘느리게 걷는 도시’라는 정체성을 얻었다.
하지만 부여는 여전히 ‘그냥 부여’였으면 좋겠다.

그 이름 하나면, 충분하니까.

 

백제문화단지. 출처 부여군청

 


아무것도 없어서, 모든 감정이 남았다

부여는 기억보다 감정이 오래 남는 도시다.
무엇을 봤는지보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더 오래 떠오른다.

궁남지의 새벽 연못,
강물에 흔들리는 햇빛,
한 나무 그늘 아래 잠시 멈춰 선 시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풍경과 마음의 장면들.
우리가 가장 바쁘고, 복잡하고, 시끄러운 지금,
이렇게 조용하고 담백한 도시가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궁남지. 출처 부여군청


그래서, 당신에게도 부여를 권하고 싶다

여긴 특별한 이벤트도 없고,
핫플도 없고,
지도 위에서 눈에 띄는 곳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도시를 찾고 있다면,
부여만 한 곳이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당신 마음이 머무를 자리가 남아 있는 곳.

 

서동요 테마파크. 출처 부여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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