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듯 남아 있는 도시, 영주
“영주에 간다고?”
그 질문엔 항상 망설임이 따라붙는다. 서울에서 한참을 돌아 들어가야 하는 거리, KTX도 닿지 않는 교통. 뭔가 특별한 것이 없을 거라는 선입견.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끌렸다.
영주는 조용하다. 너무 조용해서, 마음이 먼저 도착하는 도시다. 과거의 영광이, 고요한 현재 속에서 여전히 미세하게 울리고 있는 곳.
소수서원, 한 권의 철학서가 시작된 곳
소수서원은 단순히 오래된 교육기관이 아니다. 이곳은 조선의 교육 철학이 시작된 곳이며, 한 시대의 정신이 움튼 공간이다.
중국 유학을 다녀온 안향은 원나라에서 주자의 성리학을 배우고 돌아온다. 그는 그 사상을 조선의 뿌리에 심고자 했고, 그 첫 장소가 바로 이 영주의 ‘백운동 서원’이었다. 이후 주세붕이 이를 확장하고, 조정에서는 사액(임금이 내린 이름) ‘소수(紹修)’를 내렸다. “가르침을 잇고(紹), 닦는다(修)”는 뜻. 말 그대로 배움을 잇는 서원, 그 시작이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전설도 하나 있다.
소수서원 뒤편엔 ‘선비샘’이라 불리는 샘이 하나 있는데, 선비들이 공부하다 목이 마를 때마다 그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 샘물은 아무리 퍼내도 줄지 않고, 시험 전날 이 샘물로 손을 씻으면 시험을 잘 본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도 그 샘은 서원 뒤편에 조용히 흐르고 있다.
그리 크지 않은 강당과 서재, 담장을 따라 이어지는 돌길. 하지만 이곳은 수백 년 동안 젊은 선비들이 머물며 세상을 배운 자리였다. 학문은 단지 글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일이었기에, 소수서원은 늘 조용했지만 깊었다.
사람들이 서원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말을 줄인다. 기와지붕 너머로 비치는 소나무 그림자, 바람결에 스미는 붓 향기. 그저 오래된 유적지가 아니라, 삶의 태도를 배우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 시간의 골목을 걷다
영주 원도심 여행지로는 ‘근대역사문화거리’가 있다.
이곳은 옛 관사, 정미소, 이발소, 교회가 나란히 남아 있는 곳. 20세기 중반의 한국을 고스란히 간직한 거리로, 걷는 것만으로도 한 편의 영화처럼 느껴진다.
한때 영주는 철도 교통의 중심지였다. 서울과 영남, 강원도를 연결하는 핵심 노선이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 영주역은 늘 사람들로 붐볐고, 기차가 들어설 때마다 승강장엔 여행객과 상인, 군인, 유학생들이 북적였다. ‘기차 소리 들리면 장이 선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영주는 철길 위에 도시의 맥박을 실어 나르던 곳이었다.
지금은 한적해졌지만, 옛 역사의 그 풍경은 여전히 골목 곳곳에 아련하게 남아 있다. 낡은 철길, 오래된 간판, 그리고 기적소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소백산과 희방사, 자연이 주는 쉼표
영주의 자연도 빼놓을 수 없다.
소백산 국립공원은 철쭉과 단풍의 명소로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그 자락 아래 자리한 희방사는 산속의 절, 조용한 침묵으로 마음을 감싸주는 공간이다.
희방사는 고려 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의상대사가 이곳의 맑고 깊은 계곡에서 영감을 얻어 수행하던 중 신령한 기운을 느끼고 절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절 주변은 평소보다 공기가 맑고, 물소리조차 명상처럼 들린다.
희방폭포를 지나 절로 향하는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바쁜 마음이 내려앉는다. 특히 비 오는 날엔 절 마당을 가득 메우는 물안개와 고요한 종소리가 어우러져, 마치 시간을 잠시 멈춘 듯한 착각을 준다.
도시의 속도에 지친 여행자에게 이곳은 작은 숨구멍이 된다.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 자신과 마주하고 싶다면, 희방사는 더없이 좋은 목적지다.
풍기인삼과 영주사과, 땅이 길러낸 명품
영주는 풍기인삼의 본고장이자, 영주사과로도 유명하다.
소백산 자락의 맑은 물과 일교차 큰 기후는 인삼의 깊은 약성과 사과의 달콤한 식감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지역 특산물 그 이상으로, 영주의 땅이 길러낸 자부심이다.
풍기인삼은 조선 시대부터 임금에게 진상되던 귀한 약재였다. 지금도 풍기인삼시장은 지역 주민과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인삼을 넣은 삼계탕, 인삼 한과, 인삼주까지—영주에서는 인삼이 단순한 건강식품을 넘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영주사과는 가을 햇살을 듬뿍 받아 껍질이 얇고 속은 아삭하다. 지역 농가에서는 직접 수확한 사과로 잼이나 주스를 만들고, 사과 따기 체험도 운영한다. 단지 맛있는 과일이 아니라, 영주의 사계절과 정성을 그대로 담고 있는 과일이다.
느리지만, 그래서 오래 기억에 남는 도시
지금의 영주는 조금 한적하고 조용하다. 하지만 그 속엔 오히려 오래도록 기억될 것들이 남아 있다.
이곳엔 빠른 정보도, 핫플도 없지만, 당신 마음이 잠시 머물 자리는 있다.
영주 여행은 볼거리를 찾는 여행이 아니라, 감정을 되새기는 시간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천천히 걸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영주만큼 좋은 도시는 없다.
🧭 영주 여행 정보 요약
- 📍 대표 명소: 소수서원, 부석사,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 희방사, 소백산국립공원
- 🚌 교통 팁: KTX는 없음. 동서울터미널 → 영주 고속버스 이용 가능.
- 🛏️ 추천 숙소: 한옥스테이, 소백산 리조트 등
- 🍎 특산물: 풍기인삼, 영주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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